
오늘의 계단
퇴근길이 끝나갈 즈음, 집으로 바로 향하기가 싫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루가 너무 평범해서, 그 평범함이 내 어깨 위에 작은 돌처럼 얹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발길이 자연스럽게 강가 쪽 오래된 계단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운동 루트였고, 누군가의 데이트 코스였고, 누군가의 생각을 비워내는 장소였을 그 계단. 나는 오늘 그 사이를 잠시 빌려 쓰기로 했다.
계단은 생각보다 넓었다. 돌은 낡았고, 난간은 차갑게 빛났다. 그 위로 노을이 길게 누웠다. 마치 누군가가 붓으로 대각선의 그림자를 정성스럽게 그려 놓은 것처럼, 빛과 어둠이 번갈아 층을 만들었다. 나는 그 층을 한 칸씩 밟으며 올라갔다. 발바닥에 닿는 감각이 묘하게 단단해서, 오히려 마음이 조금씩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빛이 얼굴에 닿는 순간
꼭대기까지 다 오르기 전, 어느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난간에 손을 가볍게 얹고 숨을 고르는데, 그때 노을이 내 얼굴을 정확히 찾아왔다. 따뜻한 빛이 뺨을 타고 지나가며, 눈가와 콧등 위에 얇은 선을 그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 세상은 조용해지고 빛의 온도만 남았다.
이상하게도 그 따뜻함이 ‘기분 좋다’로만 끝나지 않았다. 어쩐지 누군가가 “고생했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내가 했던 일들이 대단한 성취는 아니었지만, 그 작은 반복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평소엔 그런 생각을 하면 바로 ‘그래도 아직 부족해’라는 문장이 따라붙었는데, 오늘은 그 문장이 늦게 도착했다. 노을이 먼저 내 마음을 잠깐 보호해준 것처럼.

나는 어떤 얼굴로 살고 있을까
눈을 뜨면, 다시 현실이 보일 텐데도 한참을 감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난 늘 어딘가를 바라보면서도 제대로 보는 일이 드물었다. 휴대폰 화면, 회사의 모니터, 사람들의 표정. 나는 그걸 보는 동시에 판단하고, 비교하고, ‘다음’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준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 빛을 얼굴로 느끼고, 내 숨소리를 듣고, 오늘의 내가 여기 서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어떤 얼굴로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세상에 보여주는 얼굴과, 나 혼자 있을 때의 얼굴, 그리고 누군가를 정말 좋아할 때의 얼굴. 그 얼굴들이 다 다르다는 걸 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내 얼굴을 하나로 정리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흩뿌려 놓고 사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을이 비추는 얼굴은 그 모든 조각들이 잠시 한곳에 모인 얼굴 같았다. 꾸미지 않아도 괜찮고, 잘하지 않아도 괜찮고,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얼굴.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마음
다시 발을 떼고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계단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고, 노을은 천천히 색을 바꿨다. 주황이 짙어지다가, 금빛이 엷어지고, 결국엔 남은 열만 공기 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 변화가 왠지 사람의 마음 같았다. 어떤 감정도 영원히 같은 색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다행이다. 슬픔도, 불안도, 답답함도, 결국엔 옅어진다. 물론 기쁨도 옅어진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기쁨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준다는 뜻이겠지.
집에 가면 또 내일이 올 거고, 나는 다시 비슷한 하루를 살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하나를 배웠다. ‘오늘을 끝까지 버텨낸 나’에게는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 그 보상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노을빛 한 줄이 얼굴에 닿는 순간처럼 작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작은 순간이 생각보다 오래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
오늘의 결론
노을을 좋아한다고 말해왔지만, 사실 나는 노을이 주는 감정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낮과 밤 사이, 무언가를 마무리하면서도 새로운 걸 시작하기 직전의 그 애매한 틈. 그 틈은 불안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정하다. 오늘의 나는 그 다정을 얼굴로 받았다.
언젠가 또 마음이 무거워지면, 나는 이 계단을 떠올릴 것이다. 대각선으로 떨어지던 긴 그림자, 차갑게 빛나던 난간, 그리고 내 얼굴을 조용히 덮어주던 노을의 따뜻함.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괜찮아지기 위해 애쓰는 나를 내가 너무 함부로 대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오늘의 일기는 여기까지. 창밖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어둡지 않다. 노을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조용한 용기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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